독일의 재통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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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독일의 재통일은 1990년 10월 3일,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분단되었던 독일이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이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에 흡수되면서 이루어진 사건이다. 1945년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4개의 점령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냉전의 영향으로 서독과 동독으로 분단되었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 이후 동독의 개혁과 개방, 시민들의 탈출과 시위가 이어졌고, 서독은 동독과의 경제적, 사회적 통합을 추진했다. 1990년 10월 3일, 동독 5개 주가 서독에 편입되면서 독일은 통일을 이루었으며, 1990년 12월 2일 동·서독 총선이 실시되어, 기독교민주당과 자유당 연정이 집권하였다. 통일 과정에서 경제적 부담과 사회적 갈등, 문화적 차이 등이 나타났지만, 독일은 국제적으로 강대국의 지위를 회복하고, 10월 3일을 독일 통일의 날로 기념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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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0년 동독 총선거는 1989년 평화 혁명 이후 처음으로 치러진 자유 선거로, 독일을 위한 연합이 승리하고 로타르 데메지에르가 총리로 선출되었으며, 동독은 독일과의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 1990년 정치 - 3당 합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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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의 재통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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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재통일 | |
주요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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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이름 | "Die Wende" (변화) |
시기 | 1989년 11월 9일 ~ 1990년 10월 3일 |
장소 | 동독 서독 |
원인 | 1989년 혁명 평화 혁명 베를린 장벽 붕괴 |
결과 | 독일 연방 공화국 하의 독일 재통일 1989년 11월 9일 베를린 장벽 개방 1990년 3월 18일 동독의 자유 선거에서 친통일 정부 수립 1990년 5월 18일 조약 체결, 1990년 7월 1일 발효된 동서독의 통화 동맹 1990년 10월 3일 동독 해체 브란덴부르크, 메클렌부르크-포어포메른, 작센, 작센-안할트, 튀링겐의 동독 주들이 재건되어 재통일 독일의 주가 됨 1990년 8월 31일 통일 조약에 따라 1990년 10월 3일 동독 주들이 서독에 합류 동독 영토가 유럽 경제 공동체 및 나토 내에서 재통일됨 1990년 9월 12일 서명된 2+4 조약으로 1991년 3월 15일 독일의 완전한 주권 회복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 합병되어 독일의 수도인 재통일된 베를린 형성 재통일된 독일은 1990년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에서 독일-폴란드 국경을 법적으로 인정 1994년 8월 31일 소비에트 연방(후 러시아) 군대 철수 완료 2000년 베를린-본 법에 따라 연방 정부의 베를린 이전 완료 |
배경 | |
관련 사건 | 1989년 혁명 냉전 종식 |
동독의 정치적 변화 | 평화 혁명으로 이어짐 |
주요 조약 및 협정 | |
통일 조약 | 독일 연방 공화국과 독일 민주 공화국 간의 독일 통일 수립에 관한 조약 |
2+4 조약 | 2+4 조약 (독일 문제 해결) |
법적 측면 | |
독일 전체 | 포츠담 협정에 기록된 문구 |
국경 인정 |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에서 국경을 법적으로 인정 |
추가 정보 | |
참고 | 자를란트는 1947년 점령된 독일에서 사실상 분리되어 보호령이 되었고, 1957년 서독의 일부가 됨 |
2. 배경
일반적으로 일본어 문헌·보도에서는 1990년에 일어난 동서독 통일을 단순히 "독일 통일"이라고 부르는 경우가 많다. 하지만 독일 역사의 역사적 맥락에서의 역사 용어·정치 용어로서, '''독일 통일'''은 현대 독일이라는 주권 국가의 틀 자체의 출발점으로 더 중요시되는, 1871년 1월 18일에 일어난 독일 제국의 성립에 이르는 운동을 가리킨다. 이 때문에 1990년의 사건에 대해서는 용어상으로 "독일'''재'''통일"로 명확하게 구분된다.
2. 1. 독일의 분단 배경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이 패망하면서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145] 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을 통해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 4개국은 독일을 점령하고, 연합국 통제위원회(ACC)를 구성하여 통치했다. 1945년 8월 2일 포츠담 회의에서는 독일의 국경을 변경하여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폴란드와 소련에 할양했다.
냉전이 심화되면서 1949년 프랑스, 영국, 미국 점령 지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으로, 소비에트 연방 점령 지역은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으로 분단되었다.[145] 서독은 마셜 플랜을 통해 경제 지원을 받았지만, 동독 주민들은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145] 두 국가는 서로를 독일 연방의 적법한 계승자라고 주장했다.[145]
1945년 나치 독일의 패전 후, 독일 영토는 미국, 프랑스, 영국, 소련의 점령하에 놓였다. 1949년, 미국, 프랑스, 영국의 점령 지역은 서독으로, 소련의 점령 지역은 동독으로 건국되었다. 서독은 건국 이후 헌법 대신 ‘기본법’을 사용했는데, 이는 “동독을 포함한 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헌법을 가질 것”이라는 의지를 담은 조치였다(기본법 제146조). 1972년 서독과 동독은 국교를 수립했지만, 기본법 제146조는 유지되었다.
2. 1. 1. 4개의 점령 지역
1945년 5월 독일 항복 이후 독일은 4개의 점령지역으로 나뉘었으며, 연합국에 의해 독일이 분할된 원래 목적은 독일이 다시 결합하여 전쟁을 도발하지 못하게 하려는 것이었다.[145]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으로 제2차 세계 대전에서 나치 독일의 패배가 확인되었고, 독일 제국도 법적으로 폐지되었다. 독일은 승전국인 연합국(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이 서명한 협정에 따라 네 나라에 의해 점령되었다. 이 선언은 또한 이 네 나라로 구성된 연합국 통제위원회(ACC)를 구성하여 독일을 통치하고, 오스트리아 합병 이전에 시행되었던 독일의 국경을 확인했다. 1945년 8월 2일 세 주요 연합국(미국, 영국, 소련) 간에 열린 포츠담 회의에서 포츠담 협정에 따라 독일은 연합국에 의해 점령 지역으로 분할되었고, 각 지역은 네 나라 중 한 나라의 군정 하에 놓였다. 이 협정은 또한 독일의 국경을 변경하여, 독일은 사실상 옛 영토인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폴란드와 소련에 잃었다 (대부분 폴란드에 귀속되었는데, 이는 폴란드의 동부 영토가 소련에 합병되었기 때문이다). 독일의 국경 결정은 소련의 스탈린 독재자의 압력으로 이루어졌다. 전쟁 중과 전쟁 후,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포함하여 중앙 및 동유럽의 전통적으로 독일 영토에 살았던 많은 독일인들이 탈출하고 추방되어 전후 독일과 오스트리아 영토로 갔다. 프랑스 점령 지역에 있는 사르란트는 1947년 12월 17일 자체 헌법이 발효되어 프랑스 보호령이 되었다. [18]
2. 1. 2. 독일연방공화국과 독일민주공화국
냉전의 영향으로 1949년, 프랑스, 영국, 미국의 점령 지역은 독일 연방 공화국(서독)이 되었고, 소비에트 연방의 점령 지역은 공산주의 국가인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이 되었다.[145] 마셜 플랜에 따라 서독은 경제 개발 지원과 화폐 개혁을 통해 발전했지만, 동독 주민들은 공산주의 체제를 받아들여야 했다.[145] 분단된 두 독일은 서로가 독일 연방의 적법한 계승자라 주장하며 경쟁했다.[145]1945년 6월 5일 베를린 선언으로 나치 독일의 패배가 확인되었고, 독일은 미국, 영국, 프랑스, 소련에 의해 분할 점령되었다. 1945년 8월 2일 포츠담 회의에서 독일의 국경이 변경되어, 독일은 오데르-나이세 선 동쪽 지역을 폴란드와 소련에 잃었다.
1948년 3월 20일 소련은 연합국 통제위원회(ACC)에서 철수하였고, 같은 해 6월 20일 서독에 신화폐(Deutsch Mark)가 도입된 후 베를린 봉쇄를 1948년 6월 20일부터 1949년 5월 12일까지 실시하였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인 서독(독일 연방 공화국)은 1949년 5월 23일 미국, 영국, 프랑스 점령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계획경제와 국유재산을 기반으로 한 공산주의 국가인 동독(독일 민주 공화국)은 1949년 10월 7일 소련 점령 지역에서 수립되었다.
서독의 수도는 본이었지만, 베를린을 수도로 삼고자 했기 때문에 임시적인 것으로 여겨졌다. 당시 베를린은 분단되어 있었고, 동베를린은 사실상 동독이 통치하고 있었다.
1949년 건국 이후 서독은 헌법(Verfassung)을 가지지 않고, 법률인 ‘기본법(Grundgesetz)’을 헌법 대신 사용했다. 그 이유는 “동독을 포함한 통일을 이룰 때 비로소 헌법을 가질 것”이라는 의지를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며, 이 내용은 기본법 제146조에 명시되어 있었다. 1972년 서독과 동독은 국교를 수립했지만, 이 시점에서도 기본법 제146조의 규정은 유지되었다.
2. 1. 3. 스탈린의 통일 제안
1952년 이오시프 스탈린은 오데르-나이세선 서쪽의 독일을 중립국으로 만들고 모든 군대를 1년 안에 철수시키는 통일 방안을 제안했다.[18] 콘라트 아데나워가 이끄는 서독 정부는 국제적인 감시 아래 선거를 통해 협상할 것을 제안했지만, 소비에트 연방은 이를 거부했다.[18] 스탈린은 독일이 바르샤바 조약을 받아들여 바르샤바 조약기구에 남는다면 1937년 국경선을 보장해 주겠다고 제안하기도 했다.2. 1. 4. 베를린 장벽
독일 민주 공화국 정부는 국경을 넘어 다른 나라로 가는 것을 금지했으며, 1961년 베를린 장벽을 세웠다.[147] 이 장벽은 서베를린으로의 인구 유출을 막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자유를 찾아 베를린 장벽을 넘으려고 하는 동독 탈출자들에게 총격을 가해 사살하였다.
2. 2. 서독의 동방정책
1969년 수상으로 취임한 빌리 브란트는 동방 정책을 추진하여 서독과 동독을 포함한 유럽 공산 국가들과의 우호적인 관계를 만들어 나갔다. 빌리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피해국가 폴란드를 방문하여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으며, 동독을 방문하였다.[146] 이러한 화해 노력으로 양측은 1974년 외교 관계를 수립하였고, 전쟁 대립 의지가 없음을 세계에 알렸다. 하지만 소련과 냉전의 선봉에 있던 미국, 그리고 서독 내 보수층들은 반공주의 이념을 갖고 있었기 때문에, 공산국가들과의 화해와 대화를 통해 이념 대립을 극복하려는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 반감을 갖고 있었다.2. 3. 미디어가 통일에 미친 영향
1973년 동독 정부는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허용했다. 이미 동독 인민의 50%가 서독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인민들이 브라운관에 비친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보면서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상대적인 우월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 정부의 예상은 빗나갔다. 인민들은 브라운관에 비친 서독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보면서 동독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147]동독의 한 유치원 교사가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에 방송하는 시계 화면을 유치원생들에게 그리라고 하자, 80%가 서독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에 방송하는 시계 화면을 그렸다는 일화는 이러한 분위기를 잘 보여준다.[148]
2. 4. 통행의 자유
서독과 동독은 현재의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과는 달리 통행과 서신 교환이 허용되었다. 동독 사람은 국가의 허가를 받으면 서독을 방문할 수 있었으며, 서독 사람은 동독 정부의 허가를 받으면 동독 방문이 가능했다. 단, 방문 목적과 기간 등을 확인하는 입국 심사를 거쳐야 했으며, 동독 공산주의 체제를 비판한 반공인사, 동독 탈출자와 그 협조자는 심사 과정과 검문소의 검문 과정에서 입국이 거부되었다. 심사에 통과하면 하루에 25 동독 마르크씩 바꾸는 의무 교환(Zwangs-Umtauschde)을 해야 했다. 바꾼 돈은 외화 수입과 암시장에서의 현금 교환 방지를 위해, 동독 체류 기간 동안 모두 쓰게 했다.[149]2. 5. 경제적 격차 최소
동독은 유럽의 공산주의 국가들 중에서 1세대 1승용차를 보유할 정도로 경제적으로 가장 발전한 나라였기 때문에, 서독과의 외교적 교류를 할 수 있는 여력이 있었다.[148] 이러한 배경은 빌리 브란트의 동방 정책 추진과 1974년 양측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긍정적으로 작용했다.[146]3. 화합
1985년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면서 중앙유럽 국가들의 개혁과 개방을 허용하기 시작했다. 동독 사회에도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동독 시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공공시설, 학교, 병원 등이 마비되었고, 국민을 감시하던 슈타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슈타지는 동독 인구의 6%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비리가 만연했다. 이에 분노한 인민들은 슈타지 기관들을 습격했고, 감시는 사라졌다.
3. 1. 동독의 변화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앙유럽의 나라들은 공산주의 체제였고, 독일의 통일은 먼 희망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1985년 개혁, 개방적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면서 중앙유럽 나라들의 개혁과 개방을 허용하면서 변화가 시작되었다.
1969년 빌리 브란트 서독 수상이 동방 정책을 추진하여 동독을 비롯한 유럽 공산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은 것도 영향을 주었다. 빌리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피해국가인 폴란드를 방문하여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고, 독일 민주 공화국을 방문하였다.[146]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 서독 내 보수층들은 반공주의 이념 때문에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 반감을 가졌다.
서독 텔레비전(ARD, ZDF)도 독일의 재통일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동독 정부는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허용했다. 그러나 동독 정부의 계산은 맞지 않았다. 인민들이 브라운관에 비친 서독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보면서 동독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147]
1989년 8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의 제한을 풀자 13,000여 명의 동독 사람들이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146]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월요일의 데모를 비롯하여 동독 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동독 인민들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de)."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146] 1989년 11월 베를린 시위때에는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며 독일 통일을 요구하기도 했다.[146]
동독의 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민중 항쟁에 굴복하여 1989년 10월 18일 사임했다. 이후 한스 모드로프 서기장은 당내 비판 인사답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개혁을 하였으며,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1당 독재가 폐지되었다.[146]
이처럼 동독 사회에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동독 시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공공시설, 학교, 병원 등이 마비되었고, 국민을 감시하던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슈타지는 동독 인구의 6%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비리가 만연했다. 이에 분노한 인민들은 슈타지 기관들을 습격했고, 감시는 사라졌다.
3. 1. 1. 개혁 개방
1969년 빌리 브란트가 서독 수상으로 취임하면서 동방 정책을 추진하여 동독을 비롯한 유럽 공산 국가들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었다. 빌리 브란트는 제2차 세계 대전 피해국가인 폴란드를 방문하여 전쟁 희생자 비석 앞에 무릎을 꿇었고, 독일 민주 공화국을 방문하였다.[146] 이러한 화해 노력으로 양측은 1974년 외교 관계를 수립했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과 미국, 서독 내 보수층들은 반공주의 이념 때문에 빌리 브란트 수상의 동방정책에 반감을 가졌다.서독 텔레비전(ARD, ZDF)도 독일의 재통일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동독 정부는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허용했다. 이미 동독 인민의 50%가 서독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고, 동독 정부는 인민들이 브라운관에 비친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보면서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상대적인 우월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 정부의 계산은 맞지 않았다. 인민들이 브라운관에 비친 서독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보면서 동독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기 때문이다.[147] 동독의 한 유치원 교사가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 시계 화면을 유치원생들에게 그리라고 하자, 80%가 서독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 시계 화면을 그렸다.[148]
198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중앙유럽의 나라들은 공산주의 체제였고, 독일의 통일은 먼 희망으로만 여겨졌다. 그러나 소비에트 연방의 정책이 바뀌었다. 1985년 개혁, 개방적인 미하일 고르바초프가 소련의 지도자가 되면서 중앙유럽 나라들의 개혁과 개방을 허용한 것이다.
3. 1. 2. 동독 인민들의 탈출
1989년 8월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의 제한을 풀자 13,000여 명의 동독 사람들이 같은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146]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월요일의 데모를 비롯하여 동독 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동독 인민들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우리가 인민이다de). 권력은 SED의 것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146] 1989년 11월 베를린 시위때에는 "Wir Sind Ein Volk(우리는 한 국민이다.)"라며 독일 통일을 요구하기도 했다.[146]3. 1. 3. 민주 개혁
1989년 헝가리가 오스트리아와의 국경 제한을 풀자 13,000여 명의 동독 사람들이 헝가리를 통해 서독으로 탈출했다. 1989년 10월 9일 라이프치히에서 있었던 월요일의 데모를 비롯하여 동독 정부에 대항하는 많은 데모가 이루어졌는데, 당시 동독 인민들은 "우리가 인민이다(Wir Sind Das Volkde). 권력은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것이 아니다."라며 민주주의를 요구하였다. 1989년 11월 베를린 시위 때에는 "우리는 한 국민이다.(Wir Sind Ein Volk)"라며 독일 통일을 요구하기도 했다.[146]동독의 통치자였던 에리히 호네커는 민중 항쟁에 굴복하여 1989년 10월 18일 사임했다. 1989년 당 서기장이 되었으나 국민들의 불신임으로 44일 만에 퇴진한 에곤 크렌츠의 뒤를 이은 한스 모드로프 서기장은 당내 비판 인사답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의 개혁을 이루었으며, 신념에 따라 병역을 거부하는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1990년 5월 6일 자유 비밀 선거를 약속하였으며,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1당 독재가 폐지되었다.[146]
3. 1. 4. 개혁과 개방의 바람
1989년 에곤 크렌츠가 당서기장이 되었으나 국민들의 불신임으로 44일 만에 퇴진하고, 그의 뒤를 이은 한스 모드로프 서기장은 당내 비판 인사답게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여러 분야에서 개혁을 추진했다. 그는 신념에 따른 양심적 병역거부를 인정하고 언론의 자유도 보장하였다. 1990년 5월 6일 자유비밀선거를 약속했으며, 급진적 개혁을 요구하는 여론에 따라 1990년 3월 18일 동독에서 처음이자 유일한 자유 선거가 실시되어 독일 사회주의통일당(SED)의 1당 독재가 폐지되었다. 이후 동독은 나라의 종말을 지지하는 정부를 구성하게 되었다. 한 공론가는 1989년에 “공산주의가 붕괴해도 폴란드는 폴란드로 남겠지만, 공산주의가 없어지면 동독은 남아있을 이유가 없다”라고 말하기도 했다.이처럼 동독 사회에 개혁과 개방의 바람이 불면서 동독 시민들이 대거 이주하여 공공시설, 학교, 병원 등이 마비되었고, 국민을 감시하던 슈타지(동독 국가보안부)에 대한 국민들의 저항이 시작되었다. 슈타지는 동독 인구의 6%에 해당하는 100만 명의 조직원을 보유하고 있었으며, 비리가 만연했다. 이에 분노한 인민들은 슈타지 기관들을 습격했고, 감시는 사라졌다.
3. 1. 5. 협상
동독은 독일 통일을 위해 서독, 영국, 프랑스, 미국, 소비에트 연방과 협상을 했다.[146] 소련은 독일의 통일 자체는 반대하지 않았지만, 동독이 NATO에 흡수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그러나 통일 독일이 NATO에서 탈퇴하지 않되, 동유럽에 NATO 가입을 확대하지 않는 것을 조건으로 통일에 합의했다.3. 2. 동·서독의 통일 논의
1990년 5월 18일 양측 독일은 경제, 통화, 사회 통합 협정을 체결하고 7월 1일에 실시했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10월 3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흡수통일(로타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가 제안)에 동의했으며, 1990년 7월 1일 경제통일이 실시되어 서독의 독일 마르크로 화폐가 통일되었다. 동독 화폐는 폐지되었고, 구 동독 화폐와 구 서독 화폐는 새로운 화폐로 교환되었다. 8월 31일 양측 독일 대표는 ‘통일 조약(Einigungsvertragde)’에 서명했다. 9월 12일 독일은 주변국가와 함께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2+4 협상)을 체결하면서 공식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았다.3. 3. 독일 통일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146] 통일 방식에는 두 가지 제안이 있었는데, 하나는 서독의 헌법인 기본법(Grundgesetz)을 동독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독일이 연방을 구성하여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동독은 더 쉬운 방법인 전자를 선택했지만, 이는 동독이 서독에 ‘합병’된다고 느껴질 수 있다는 부담이 있었다.1990년 5월 18일 양측 독일은 경제, 통화, 사회의 통합을 협상하여 7월 1일에 실시했다. 8월 23일 동독 의회는 10월 3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흡수통일(로타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가 제안)에 동의했으며, 1990년 7월 1일 경제통일이 실시되어 서독의 독일 마르크로 화폐가 통일되었다. 동독 화폐는 폐지되었고, 구 동독 화폐와 구 서독 화폐는 새로운 화폐로 교환되었다. 8월 31일 양측 독일 대표는 ‘통일 조약(Einigungsvertragde)’에 조인했다. 9월 12일 독일은 주변 국가와 함께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2+4 협상)을 조인하면서 공식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았다.

다른 나라에 통일 과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독일연방공화국은 헌법을 두 번 고쳤다. 우선 통일을 적법화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했고, 통일 후에는 헌법에 “통일된 영토 바깥에 독일의 영토는 없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1990년 12월 2일 동·서독 총선이 실시되어, 기독교민주당과 자유당 연정이 집권하였다.
법률적 해석으로는 독일이 “재통일”한 것이 아니라, 독일 민주 공화국(동독)의 영역을 구성하고 있던 모든 주(州)가 독일 연방 공화국에 “가입”했다고 볼 수 있다.
4. 영향
동방 정책에 기반한 외교 노력 외에도 서독 텔레비전(ARD, ZDF) 또한 독일의 재통일에 영향을 준 것으로 알려져 있다. 1973년 동독 정부는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허용했다. 이미 동독 인민의 50%가 서독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는 것은 불가능했고, 인민들이 브라운관에 비친 자본주의 체제의 결함을 보면서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상대적인 우월성을 깨닫게 될 것이라고 예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독 정부의 예상은 빗나갔다. 인민들은 브라운관에 비친 서독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보면서 동독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147]
동독의 한 유치원 교사가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에 방송하는 시계 화면을 유치원생들에게 그리라고 시켰는데, 80%가 서독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에 방송하는 시계 화면을 그렸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서독 텔레비전 시청 허용의 여파는 매우 컸다.[148]
4. 1. 경제적 부담
독일 통일은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어 경제 발전을 더디게 했다. 통일 비용은 주로 독일 통일 기금과 독일 연대 협약을 통해 조달되었다. 베를린 자유 대학교의 발표에 따르면 통일에 들어간 비용은 1조 5,000억 유로(1800조 원)로 추산된다.[150]주요 원인은 동독 경제가 서독에 비해 약했으며,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 사이의 환율이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하여 동독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기 때문이다. 1990년 5월 18일, 두 독일 국가는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연방공화국 간의 통화, 경제 및 사회 연합 설립 조약"에 서명했다.[36] 이 조약은 1990년 7월 1일에 발효되었으며, 서독 마르크가 동독의 공식 통화가 되었다. 동독은 재정 정책 주권을 서독에 이양했고, 서독은 동독 예산과 사회 보장 시스템에 대한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38]
통일 이후 동독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대규모 보조금이 계속 지급되고 있다. 지금도 동독 지역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매년 1000억 유로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150] 동독 지역은 재건 시대 이후의 미국 남부나 남부 이탈리아와 비교되기도 한다. 동독 경제는 최근 회복되었지만, 동서 간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98][99]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동독의 총 임금은 서독 수준의 35%에서 74%로, 연금은 40%에서 79%로 증가했다.[110] 실업률도 서독의 두 배에 달했다.
4. 2. 사회적 갈등
서독 사람들은 동독 사람들을 우스갯소재로 삼는 등 감정 대립이 있었다.[150] 통일 당시 14-15세였던 구 동독 청년 세대는 극단적인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합류하려 하지 않으며, 동독 체제에 대한 향수를 느끼는 경향이 있다. 예나대학교 루츠 니트함머 명예교수는 이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151]- 구 동독 청년세대는 동독이 다른 중앙유럽 구 공산국가들에 비해 생활 수준이 나았고, 학교에서 체제 선전 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동독 체제에 향수를 가지고 있다.
- 구 동독 청년세대는 부모 세대를 역사의 실패자이자 보호자라고 생각하며, 사회학자들은 이들을 부모의 부모라고 부른다.
- 자본주의와 물질주의에 대해 부정적인 반면, 개인주의적인 성향이 강하다.
동독과 서독 사이에는 생활 방식, 부, 정치적 신념 등에서 큰 차이가 남아있어, "머릿속의 장벽"(독일어: Mauer im Kopf)이라는 표현이 사용될 정도로 동독과 서독을 구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94] "오시"(Ossis, 동독인)는 인종차별주의적이고 가난하며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으로, "베시"(Wessis, 서독인)는 속물적이고 부정직하며 부유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진다.[95] 동독인들은 현상 유지에 대한 불만과 독일의 나머지 지역과의 문화적 소외감, 그리고 통일된 독일에서 그들의 문화 유산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나타낸다. 반면 서독은 동독의 의견에 무관심해졌고, 이는 동독에 대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켜 격차를 악화시켰다.[96]
4. 3. 문화적 영향
1973년 동독 정부는 서독 텔레비전 시청을 허용했다. 이미 동독 인민의 50%가 서독 텔레비전을 보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막을 수 없었고, 오히려 서독 텔레비전의 자본주의 체제 모습을 통해 동독 공산주의 체제의 우월성을 깨닫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동독 주민들은 서독 사회의 풍요로움과 자유를 보면서 동독 정부에 반감을 갖게 되었다.[147] 동독의 한 유치원 교사가 텔레비전 뉴스 방영 전 시계 화면을 그리게 했을 때, 80%의 유치원생들이 서독 텔레비전의 시계 화면을 그렸다는 일화는 이러한 사회 분위기를 보여준다.[148]독일 통일 비용은 독일 경제에 큰 부담을 주어 경제 발전을 더디게 했다. 독일 통일 기금과 독일 연대 협약을 통해 통일 비용을 마련했지만, 베를린 자유 대학교 발표에 따르면 통일 비용은 1조 5,000억 유로(1800조원)로 추산된다. 동독 경제가 서독에 비해 약했고, 동서독 마르크 간 환율이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동독 산업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 주요 원인이었다. 현재도 구 동독 지역 경제 회복을 위해 매년 1000억 유로 이상이 투입되고 있다. 또한, 서독 사람들이 동독 사람들을 우스갯소리로 삼는 감정 대립도 해결해야 할 문제이다.[150]
통일 당시 14-15세였던 구 동독 청년 세대(1976-1977년생)는 극단적인 경쟁에 적응하지 못하고 자본주의 체제에 적극적으로 합류하지 않는 경향을 보인다. 예나대학교 루츠 니트함머 명예교수는 이들의 특징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151]
구 동독 청년 세대의 특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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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명칭
"독일 재통일"이라는 용어는 1949년 외세에 의해 분단된 이후 동독이 서독에 완전한 독일 주권을 가지고 합병되는 과정을 가리키는 말로, 4개 연합국 점령 지역으로부터의 독립을 강조하기 위해 사용되었다.[1] 이는 프로이센 왕국이 주도하여 1866년 8월 18일부터 1871년 1월 18일까지 대부분의 독일 주들이 독일 제국(독일 라익)으로 통합되는 과정인 독일 통일과는 구별된다.[1] 1990년 10월 3일은 독일이 다시 단일 국가가 된 날이다. 그러나 정치적, 외교적 이유로 서독 정치인들은 독일인들이 흔히 ''Die Wende''(대략 "전환기")라고 부르는 시기까지 "재통일"이라는 용어를 신중하게 피했다.[1] 1990년 조약은 공식 용어를 Deutsche Einheit|독일 통일de로 정의한다.[1] 이 용어는 독일에서 일반적으로 사용된다.
일부 사람들은 재통일을 서독에 의한 동독의 합병으로 분류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5][6][7][8][9][10][11]
6. 통일 과정
1990년 5월 18일 동서독은 경제, 통화, 사회 통합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고, 7월 1일 서독 독일 마르크가 동독의 공식 통화로 도입되면서 경제 통합이 이루어졌다.[36] 8월 23일 동독 의회는 10월 3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방식(로타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가 제안)에 동의했으며, 8월 31일 양측 독일 대표는 ‘통일 조약(Einigungsvertragde)’에 서명했다. 9월 12일 독일은 주변국가와 함께 독일관련 최종해결에 관한 조약 (2+4 협상)을 체결하여 공식적으로 주권을 인정받았다.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통일에는 서독의 헌법인 기본법을 동독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방법과 두 독일이 연방을 구성하여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방법이 제안되었으나, 동독은 더 쉬운 전자를 선택했다. 다만, 이는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
독일연방공화국은 다른 나라에 통일 과정을 안심시키기 위해 헌법을 두 번 고쳤다. 통일을 적법화하기 위해 헌법을 수정했고, 통일 후에는 “통일된 영토 바깥에 독일의 영토는 없다.”는 내용을 추가했다. 1990년 12월 2일 동·서독 총선이 실시되어, 기독교민주당과 자유당 연정이 집권하였다.
6. 1. 협력
1989년 11월, 헬무트 콜 서독 총리는 통일을 위한 10개항 프로그램을 발표했다. 1990년 3월, 동독 최초의 자유 선거에서 신속한 통일을 주장하는 보수 연합인 '독일 연합'이 승리했다.6. 2. 경제 통합
1990년 5월 18일, 동독과 서독 양측은 경제, 통화, 사회 통합에 관한 조약에 서명했다. 7월 1일에는 서독 독일 마르크가 동독의 공식 통화로 도입되면서 경제 통합이 이루어졌다. 이 조약은 '''독일민주공화국과 독일연방공화국 간의 통화, 경제 및 사회 연합 설립 조약'''으로 불린다.[36] 동독 마르크는 폐지되었고, 서독 마르크는 동독인들 사이에서 높은 평가를 받으며 안정적인 통화로 여겨졌다.[37] 동독은 재정 정책 주권을 서독에 이양했고, 서독은 동독 예산과 사회 보장 시스템에 보조금을 지급하기 시작했다.[38] 동시에 많은 서독 법률이 동독에 적용되면서, 기존의 정치, 사회, 경제 시스템 간의 큰 격차를 줄이고 정치적 통합을 위한 기반을 마련했다.[38]6. 3. 독일 재통일 조약
1990년 8월 23일 동독 의회는 10월 3일 동독이 서독에 흡수되는 흡수통일(로타어 드 메지에르 동독 총리가 제안)에 동의했으며, 8월 31일 양측 독일 대표는 ‘통일 조약(Einigungsvertragde)’에 서명했다.6. 4. 헌법 통합
1990년 10월 3일, 동독의 다섯 개 주가 서독으로 편입되면서 독일의 통일이 이루어졌다. 통일에는 두 가지 방법이 제안되었는데, 하나는 서독의 헌법인 기본법(Grundgesetz)을 동독이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두 독일이 연방을 구성하여 새로 헌법을 제정하는 것이었다. 동독은 더 쉬운 방법인 전자를 선택했지만, 이는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비판을 받았다.동독은 서독 기본법 제23조에 따라 서독에 가입하는 방식을 선택했다. 이 방식은 신속한 통일을 가능하게 했지만, 동독이 서독에 '합병'되는 것처럼 보일 수 있다는 비판도 있었다.[2] 이러한 방식은 헌법 또는 기본법 자체를 둘러싼 논의의 기회가 부족했고, 헌법을 둘러싼 국민적 논의를 거쳐 새로운 국가를 건설해야 했다는 비판도 있다.[3] 대표적인 비판론자로는 유르겐 하버마스 등이 있다.[3]
하지만, "재통일"이라는 대사업을 달성하려면 원칙을 무시하더라도 "환희와 감동"이라는 분위기에 올라타지 않으면 다른 나라의 간섭을 초래하여 실현이 불가능했을 것이라는 현실적인 의견도 존재한다.[4]
6. 5. 베를린 통일
베를린 장벽 붕괴는 전 세계적으로 광범위한 영향을 미쳤지만,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라는 분단된 두 지역이 40년 만에 다시 통합되는 결과를 가져왔다.[112] 통일된 베를린은 주요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감이 있었다.[113][114]



베를린은 독일의 정부 소재지로 다시 자리매김하면서, 수많은 외국 대사관을 위한 부지 재개발을 포함한 정부의 필요를 충족하는 건물이 필요했다.[52]
도시 정체성을 재정의하는 과정에서 베를린은 나치와 사회주의 유산과 분리하고자 했다. 하지만 일부 유적은 보존되었고, 장벽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국경 지대를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었다.[52] 동베를린 중심부에서는 동독 국가의 모더니즘 유산 대부분이 점차 제거되었다.[54] 베를린 통일은 동베를린의 사회주의 유산을 줄이려는 시도로 동쪽의 정치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거리 이름과 기념물을 제거했다.[114]
장벽 붕괴 직후 베를린은 건설업 호황을 경험했고,[51]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세계에서 가장 큰 건설 현장 중 하나가 되었다.[53]
장벽 붕괴는 경제적 결과도 초래했다. 서로 다른 경제적 기회를 제공하는 두 체제가 갑작스럽게 통합되면서 어려움이 발생했다.[115] 베를린은 여전히 국가의 금융 중심지인 프랑크푸르트는 물론 뮌헨, 함부르크, 슈투트가르트, 뒤셀도르프와 같은 서독의 다른 주요 중심지와 경제적으로 경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16][117] 집중적인 건설 활동은 사무 공간의 과잉 확장으로 이어졌고, "본에서 대부분의 행정부와 정부 기관이 이전했음에도 불구하고 높은 공실률을 보였다".[51][118]
베를린은 탈산업화와 관련된 단절된 경제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16][117] 경제학자 올리버 마크 하트위히(Oliver Marc Hartwich)는 동독이 경제적으로 개선되었지만, "당시 총리 헬무트 콜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다고 주장한다.[119] 재통일 후 수십 년 동안 전 동독과 서독 간의 부와 소득 불평등은 계속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 서독 성인의 평균 자산은 94000EUR였던 반면, 전 공산주의 동독 성인의 자산은 40000EUR를 약간 넘었다.[120]
베를린 장벽 붕괴와 여러 요인들은 대규모 이주를 초래하여 서독에 큰 노동 공급 충격을 주었다.[115] 1989년부터 1992년 사이에만 87만 명에 달하는 동독 이민[121]은 교육 수준이 가장 낮은 노동자, 숙련 노동자, 남성 및 외국인의 고용 결과를 악화시켰다.[115]
세기말이 되자 베를린은 독일의 금융 및 상업 중심지가 아닌 행정 중심지 역할을 수행하면서, 런던과 파리와 같은 유럽의 주요 도시 수준으로 성장하기는 어렵다는 것이 분명해졌다.[114]
하지만 베를린의 동부와 서부 지역 간의 불균형은 도시가 새로운 도시 정체성을 갖게 만들었다. 동베를린의 여러 지역은 거의 무료로 방치된 공간을 활용하는 주택이 특징이며, 베를린의 창의적인 활동의 중심지가 되었다.[122] 베를린 시장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는 "베를린이 제공하는 최고의 것, 그 독특한 창의성. 창의성은 베를린의 미래다."라고 말했다.[122]
6. 6. 독일 통일의 날
10월 3일은 서독 기본법 23조에 따라 동독의 주가 서독에 가입하여 독일 재통일이 실현된 날이다.7. 국내외 반응
1980년대 서독의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등 좌파 정당들은 통일에 반대하며 두 독일 국가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지지했다.[57] 이들은 독일 분단이 유럽 평화 유지에 필요하며, 통일 독일은 서독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57] 여론조사에서도 통일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타났는데, 특히 35세 이하 젊은층과 저소득층에서 반대가 두드러졌다.[58] 1990년 7월 여론조사 결과, 통일의 주된 동기는 민족주의가 아닌 경제적 우려였다.[58][59] 통일 이후에도 지역 간 분열은 지속되었고, 동서독 간 '심리적 장벽'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머릿속의 장벽"(Mauer im Kopf)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62]
반독일주의자들은 통일 독일이 파시즘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일에 반대했다.[57] 귄터 그라스 등 일부 지식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비극적인 기억을 이유로 통일에 반대했다.
서독의 동맹국들은 대체로 재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는 공개적으로 반대한 몇 안 되는 세계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69] 그러나 재통일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오자 비공개적으로 상당한 NATO와 유럽의 반대가 나타났다.[69]
1990년 1월 미국, 프랑스, 영국, 폴란드 4개국의 여론 조사 결과, 미국과 프랑스의 응답자 대다수가 재통일을 지지한 반면, 영국과 폴란드는 의견이 분분했다. 폴란드 응답자의 69%, 프랑스와 영국 응답자의 50%가 재통일된 독일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될까 우려한다고 밝혔다.[71]
미국은 핵심 동맹국으로서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헬무트 콜의 제안에 대한 강력하고 단호한 지지를 제공했다.[72][73]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독일 재통일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중 한 명이었다. 대처는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에 "우리는 통일된 독일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히 했다.[76] 그녀는 독일의 "국민성", 크기, 유럽 중심부 위치 때문에 독일이 "유럽에서 안정적인 세력이기보다는 불안정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77]
right (노란색과 주황색)]]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은 통일된 독일이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80] 그는 "나쁜" 독일인들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다.[75] 그러나 두 지도자는 재통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69]
아일랜드 총리 찰스 호이는 독일 통일을 지지했으며, 유럽 경제 공동체(EEC) 의장 자격으로 특별 유럽 정상회담을 소집했다.[82][83][84] 데어 슈피겔은 나중에 당시 다른 유럽 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냉담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탈리아 총리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범게르만주의"의 부활에 대해 경고했고, 네덜란드 총리 루드 루버스는 독일의 자결권에 의문을 제기했다.[69]
7. 1. 국내 반대
1980년대 서독의 사회민주당(SPD)과 녹색당 등 좌파 정당들은 통일에 반대하며 두 독일 국가 간의 평화로운 공존을 지지했다.[57] 이들은 독일 분단이 유럽 평화 유지에 필요하며, 통일 독일은 서독 민주주의에 위협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57] 1981년 독일 언론인 피터 벤더는 "두 차례의 세계 대전에서 독일이 한 역할을 고려할 때, 유럽과 독일인 모두 새로운 독일 제국, 즉 주권 국가를 원치 않는다"고 썼다.[57]여론조사에서도 통일에 대한 반대 의견이 나타났다. 특히 35세 이하 젊은층과 저소득층에서 반대가 두드러졌다.[58] 1980년대 후반 여론조사에서는 젊은 동독인과 서독인들이 서로를 외국인으로 인식하는 경향이 나타났다.[57] 1990년 7월 여론조사 결과, 통일의 주된 동기는 민족주의가 아닌 경제적 우려였다.[58][59]
통일 이후에도 지역 간 분열은 지속되었다. 1993년 설문조사에서 서독인의 22%, 동독인의 11%만이 자신들을 하나의 국가로 인식했다.[57] 동서독 간 '심리적 장벽'이 존재함을 의미하는 "머릿속의 장벽"(Mauer im Kopf)이라는 표현이 등장했다.[62]
7. 2. 사회 집단 및 인물
반독일주의자들은 통일 독일이 파시즘의 부활로 이어질 것이라고 주장하며 통일에 반대했다.[57] 동독의 소수 민족들은 통일 이후 차별과 동화 정책을 우려했다. 페미니스트 단체들은 동독의 낙태법과 여성 복지 정책이 서독보다 진보적이었기 때문에 통일에 반대했다. 귄터 그라스 등 일부 지식인들은 제2차 세계 대전의 비극적인 기억을 이유로 통일에 반대했다.1980년대 서독의 좌파 정당, 특히 SPD와 그린당 사이에서는 통일된 독일 국가에 대한 반대와 두 독일 국가 간의 지속적인 평화 공존에 대한 지지가 매우 일반적이었다.[57] 독일 언론인 피터 벤더는 1981년에 "독일이 두 차례의 세계 대전의 원인에서 수행한 역할을 고려할 때, 유럽은 새로운 독일 제국, 주권 국가를 원할 수 없으며, 독일인들도 그래서는 안 된다."라고 썼다.
1980년대 후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젊은 동독인과 서독인들은 서로를 외국인으로 여겼고, 자신들을 하나의 국가로 여기지 않았다.[57] 하인리히 아우구스트 빙클러는 "1989년 독일 아카이브의 관련 데이터 평가 결과, 동독은 젊은 세대의 상당 부분이 더 이상 독일의 일부가 아닌 다른 사회 질서를 가진 외국 국가로 인식했다는 것을 보여주었다"고 언급한다.
통일 후에도 지역 간의 분열은 지속되었다. 1993년 4월 알렌스바흐 연구소의 설문 조사에 따르면 서독인의 22%와 동독인의 11%만이 자신들이 하나의 국가라고 생각했다.[57] 이러한 정신 상태는 "머릿속의 장벽"(Mauer im Kopf)으로 알려지게 되었는데, 이는 베를린 장벽 붕괴에도 불구하고 동독과 서독 사이에 "심리적 장벽"이 여전히 존재한다는 것을 시사한다.[62]
7. 3. 국외 지지 및 반대
서독의 동맹국들은 대체로 재통일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 이스라엘 총리 이츠하크 샤미르는 공개적으로 반대한 몇 안 되는 세계 지도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홀로코스트에서 "수백만 명의 유대인을 죽이기로 결정한" 나라("나치 독일"이라 추정되는 국가)가 "다시 그렇게 할 것이다"라고 추측했다.[69] 그러나 재통일이 현실적인 가능성으로 다가오자 비공개적으로 상당한 NATO와 유럽의 반대가 나타났다.[69]1990년 1월 4개국의 여론 조사 결과, 미국과 프랑스의 응답자 대다수가 재통일을 지지한 반면, 영국과 폴란드는 의견이 분분했다. 폴란드 응답자의 69%, 프랑스와 영국 응답자의 50%가 재통일된 독일이 "유럽에서 지배적인 세력"이 될까 우려한다고 밝혔다. 응답자들은 독일이 다시 영토 확장을 시도하고, 나치즘이 부활하며, 독일 경제가 너무 강력해지는 것 등 여러 우려를 제기했다. 영국, 프랑스, 미국은 독일이 NATO 회원국으로 남는 것을 선호했지만, 폴란드 응답자 대다수는 재통일된 국가의 중립성을 지지했다.[71]
핵심 동맹국은 미국이었다. 일부 미국 고위 관리들이 신속한 통일을 반대했지만, 제임스 베이커 국무장관과 조지 H. W. 부시 대통령은 헬무트 콜의 제안에 대한 강력하고 단호한 지지를 제공했다.[72][73]
는 처음에 통일된 중립국 독일을 요구했다.[70]
영국 총리 마거릿 대처는 독일 재통일의 가장 강력한 반대자 중 한 명이었다. 베를린 장벽 붕괴 이전에 대처는 소련 서기장 미하일 고르바초프에게 영국도, 그녀의 말에 따르면 서유럽도 독일 재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 대처는 또한 고르바초프에게 그것을 막기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해달라고 말하며, "우리는 통일된 독일을 원하지 않습니다"라고 분명히 했다.[76] 그녀는 동독 민주주의를 환영했지만, 신속한 재통일이 고르바초프를 약화시킬 수 있다고 우려했고, 통일된 독일의 대항마로서 소련군이 동독에 가능한 한 오랫동안 주둔하기를 바랐다.[69][77]
"독일 문제"를 다른 사람들에게 보여주기 위해 가방에 1937년 독일 국경 지도를 가지고 다녔던 대처는 독일의 "국민성", 크기, 유럽 중심부 위치 때문에 독일이 "유럽에서 안정적인 세력이기보다는 불안정적인 세력"이 될 것이라고 우려했다.[77] 1989년 12월, 그녀는 콜이 참석한 스트라스부르에서 열린 이사회 정상회담에서 다른 유럽 공동체 지도자들에게 "우리는 독일을 두 번이나 패배시켰다! 이제 그들이 돌아왔다!"라고 경고했다.[69][75] 대처는 1985년에 독일의 자결권을 지지한다고 밝혔지만,[77] 이제는 독일의 동맹국들이 재통일을 지지하는 것은 그것이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고 믿지 않기 때문이라고 주장했다.[69] 대처는 양국이 별개의 국가로 남아 있는 5년간의 과도기를 선호했다. 그녀는 점차 반대를 누그러뜨렸지만, 1990년 3월까지도 체커스에서 역사가와 외교관들을 세미나에 소집하여 "독일인들은 얼마나 위험한가?"라고 질문했고,[77][75] 런던 주재 프랑스 대사는 대처가 자신에게 "프랑스와 영국은 오늘날 독일의 위협에 직면하여 협력해야 한다"고 말했다고 보고했다.[80][78]
right (노란색과 주황색)]]
사건의 속도는 프랑스를 놀라게 했는데, 프랑스 외무부는 1989년 10월 재통일이 "현재로서는 현실적이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고 결론지었기 때문이다.[79]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미테랑의 대표는 고르바초프의 보좌관에게 "결국 불가피하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프랑스는 결코 독일 재통일을 원하지 않는다"고 말했다고 한다.[76] 스트라스부르 정상회담에서 미테랑과 대처는 독일의 역사적 국경의 유동성에 대해 논의했다.[69] 1990년 1월 20일, 미테랑은 대처에게 통일된 독일이 "심지어 아돌프 히틀러보다 더 많은 영토를 차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80] 그는 "나쁜" 독일인들이 다시 등장할 것이라고 예측했는데,[75] 그들은 제2차 세계 대전 후 상실된 독일의 옛 영토를 되찾으려 할 것이며 헝가리, 폴란드, 체코슬로바키아를 지배할 가능성이 높고,[77] "우리 나머지 사람들에게는 루마니아와 불가리아만 남을 것"이라고 했다. 그러나 두 지도자는 "우리 중 누구도 독일과 전쟁을 선포하려고 하지 않았기 때문에" 재통일을 막을 방법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69] 미테랑은 대처보다 먼저 재통일이 불가피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자신의 견해를 조정했으며, 그녀와 달리 단일 통화와 다른 유럽 기구에 참여하면 통일된 독일을 통제할 수 있다고 낙관했다.[77] 그러나 미테랑은 독일로부터 더 많은 양보를 얻기 위해 대처가 공개적으로 통일을 반대하기를 여전히 바랐다.[75]
아일랜드의 타오이세흐(총리) 찰스 호이는 독일 통일을 지지했으며, 1990년 4월 더블린에서 EEC 회원국들의 우려를 진정시키기 위해 유럽 경제 공동체(EEC) 의장 자격으로 특별 유럽 정상회담을 소집했다.[82][83][84] 호이는 아일랜드와 독일의 유사성을 발견하고 "우리는 분단된 국가(아일랜드 분할) 출신이기 때문에, 두 독일 국가 국민들의 통일 염원에 많은 사람들이 공감할 것이라는 개인적인 견해를 표명했다"고 말했다.[85] ''데어 슈피겔''은 나중에 당시 다른 유럽 지도자들의 통일에 대한 견해를 "냉담한" 것으로 묘사했다. 이탈리아의 줄리오 안드레오티는 "범게르만주의"의 부활에 대해 경고했고, 네덜란드의 루드 루버스는 독일의 자결권에 의문을 제기했다. 그들은 독일 군국주의의 부활과 통일된 국가의 경제력에 대한 영국과 프랑스의 우려를 공유했다. 통일은 반드시 일어나야 한다면 최소한 1995년 이후, 가능하면 훨씬 더 늦게 일어나야 한다는 것이 일반적인 의견이었다.[69] 안드레오티는 프랑수아 모리아크를 인용하며 "나는 독일을 너무나 사랑해서 차라리 두 개의 독일이 있는 편이 낫다고 생각한다"고 농담했다.
7. 4. 최종 해결
제2차 세계 대전의 승전국들(프랑스, 소련, 영국, 미국)은 베를린에 대한 권한을 유지했다.[69] 소련은 독일 재통일을 통해 독일을 북대서양 조약 기구(NATO)에서 중립으로 만들고 영토에서 핵무기를 제거하려 했다.[69] 그러나 서독은 1989년 11월 21일 이 주제에 대한 외교 메시지를 잘못 해석했고, 콜은 11월 28일 독일과 유럽 분단 극복을 위한 10개항 계획을 발표했다.[69][86]미국은 독일 확장주의에 대한 역사적 우려를 공유하지 않았다.[87] 조지 H. W. 부시 행정부는 통일된 독일의 나토 회원국 유지를 재통일 지지 조건으로 내걸었고, 콜은 이에 동의했다.[69]
1990년 5월, 고르바초프는 독일의 나토 회원국 문제와 관련하여 독일이 국제적 정렬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다는 발언을 하여 미국과 독일 모두를 놀라게 했다.[69] 콜은 통일된 독일이 서독의 나토와 EC 의석을 상속받을 것이라는 의도를 분명히 했다.
캐나다 오타와에서 열린 나토-바르샤바 조약 기구 회담에서, 겐셔는 4강에게 두 독일을 동등하게 간주하고 6개국이 단독으로 협상하도록 설득했다.[69] 1990년 3월, 6개국은 협상을 시작했다. 고르바초프가 독일의 나토 회원국에 대한 합의를 한 후, 소련은 독일이 전 동독 영토에 외국 나토군이나 핵무기를 배치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독일을 일반적인 나토 국가로 취급하는 데 동의했다.[69] 그 대가로 콜은 서독과 동독 모두의 군대 규모를 축소하고, 대량살상무기를 포기하며, 오데르-나이세선을 독일의 동쪽 국경으로 받아들이는 데 동의했다. 또한 독일은 소련에 약 의 기증과 대출을 지불하기로 동의했다.[69]
7. 5. 독일 주권 및 연합군 철수
1990년 9월 12일 모스크바에서 당시 존재하던 동독과 서독, 그리고 4개의 주요 연합국(영국, 프랑스, 소련, 미국) 사이에 독일 문제에 관한 최종 조약(2+4 조약)이 체결되었다.[88] 이 조약은 1991년 3월 15일에 발효되었으며, 독일 연방 공화국과 4개 연합국에 의해 비준되었다. 조약의 발효로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합의에 따른 독일 주권에 대한 제한과 연합군 통제 위원회(ACC)가 종식되었다.[88]1990년 10월 1일, 4개 연합국 외무장관이 뉴욕에서 서명하고 당시 존재하던 두 독일의 장관이 증인으로 참석한 선언에 따라, 1990년 10월 3일 독일 통일 이후 2+4 조약의 최종 비준을 기다리는 동안 모든 4자 연합군 기관의 운영이 중단되었다.[88]
최종 조약에 따라, 독일 내에 남아 있던 마지막 연합군은 1994년 12월 31일을 철군 시한으로 하여 1994년에 철수했다.[90] 1994년 6월 25일, 러시아 지상군 대부분이 베를린에서 제6근위기계화소총여단의 군사 퍼레이드와 함께 독일을 떠났다. 1994년 7월 12일 미 육군 베를린 사령부가 폐쇄되었고, 1994년 8월 31일 마지막 러시아 군대가 철수를 완료했다.[90] 서방 연합군은 러시아 철수가 완료될 때까지 베를린에 주둔했으며, 1994년 9월 8일 샤를로텐부르크 궁전 안뜰에서 열린 작별식을 마지막으로 철수했다.[90][91]
조약 제5조는 구 동독 지역에 핵무기 배치 및 비독일 군사 인원 주둔을 금지했다.[92]
7. 6. 폴란드 국경


1990년 11월 14일, 독일과 폴란드는 독일-폴란드 국경 조약을 체결하여 오데르-나이세 선을 독일의 동쪽 국경으로 영구히 확정하고, 실레시아, 동부 브란덴부르크, 포메라니아, 그리고 구 동프로이센 남부 지역(폴란드에서는 이 지역을 피아스트 폴란드 시대에 지배했던 지역이라는 의미로 "회복된 영토"라고 부른다)[93]에 대한 모든 권리를 포기했다. 이 조약은 1991년 11월 26일 폴란드 세임과 1991년 12월 16일 독일 연방의회에서 승인되었으며, 1992년 1월 16일 비준서 교환과 함께 발효되었다. 독일과 폴란드 사이의 국경 확인은 2+4 조약에서 네 개의 연합국이 독일에 요구한 사항이었다. 이후 양국 간의 우호 협력 조약(1992년 1월 16일 발효)을 통해 폴란드(상실레시아)에 남아 있는 소수의 독일인에 대한 더 나은 대우를 보장했다.
8. 결과
독일의 재통일은 국내외적으로 다양한 영향을 미쳤다.
국제적 영향통일 독일은 강대국으로 부상했으며, 구 서독의 UN, NATO, 유럽 공동체 등 국제기구 지위와 조약을 그대로 계승했다. 독일 기본법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영구적인 동부 국경으로 확정하는 등 개정되었다.[94] 이는 2+4 조약에 따른 의무였다.
국내적 영향동서독 간에는 생활 방식, 경제력, 정치적 신념 등에서 여전히 차이가 존재하며, 이는 "머릿속의 장벽"(Mauer im Kopf)으로 불린다.[94] 상호 간 고정관념도 존재한다.[95] 동독인들은 문화적 소외감과 경제적 어려움을 겪었고, 서독은 동독에 대한 무관심으로 인해 반감을 샀다.[96]
통일 이후 동독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으나, 서독의 지원으로 점차 회복되었다. 그러나 동서독 간 경제 격차는 여전히 존재한다.[98][99]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동독의 총 임금은 서독의 35%에서 74%로, 연금은 40%에서 79%로 증가했지만,[110] 실업률은 여전히 서독의 두 배였다.
베를린 통합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은 베를린 장벽 붕괴로 통합되었고, 베를린은 독일의 수도로 재건되었다. "비판적 재건" 정책을 통해 나치와 공산주의 유산을 분리하면서도 일부는 보존했다.[52] 동베를린 중심부의 모더니즘 유산은 대부분 제거되었고,[54] 정치적 거리 이름과 기념물도 제거되었다.[114]
베를린은 건설 붐을 겪었지만,[51] 경제적으로는 프랑크푸르트, 뮌헨, 함부르크 등 다른 도시에 비해 어려움을 겪었다.[116][117] 사무 공간 과잉 공급과 탈산업화로 인한 경제 구조조정도 문제였다.[51][118][116][117] 동서독 간 부의 불평등도 지속되었다.[120]
대규모 이주로 인해 서독에 노동 공급 충격이 발생했고,[115]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들의 고용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15]
하지만 동베를린 일부 지역은 창의적인 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122]
8. 1. 국제적 영향
통일로 독일은 다시 세계적인 강대국이 되었다. 독일 민주 공화국(구 동독)의 영토를 독일 연방 공화국(구 서독)에 편입하고, 확장된 독일 연방 공화국의 법적 인격을 유지하는 방식으로 통일이 이루어졌다. 그 결과, 확장된 독일 연방 공화국은 기존 서독이 가지고 있던 UN, NATO, 유럽 공동체 및 기타 국제 기구의 지위를 그대로 계승했다. 또한, 기존 서독이 통일 직전까지 체결한 모든 조약의 당사국 지위도 유지했다. 통일 조약에 따라 개정된 독일 연방 공화국의 기본법과 법률은 자동적으로 계속 시행되었지만, 이제는 구 동독 지역까지 포함하는 확장된 영토에 적용되었다. 독일 연방 공화국의 대통령, 총리(수상), 정부는 그대로 유임되었지만, 그 관할권은 새로 획득한 구 동독 영토까지 포함하게 되었다.이러한 과정을 원활하게 하고 다른 국가들을 안심시키기 위해 독일 헌법에 근본적인 변화가 이루어졌다. 서문과 146조가 개정되었고 23조는 대체되었지만, 삭제된 기존 23조는 1990년 통일을 위한 헌법적 모델로 적용되었다. 동독의 5개 "신주(Neue Länder)"가 합류하기 전에 기본법은 독일의 모든 영토가 통일될 것이며, 따라서 독일은 더 이상 독일의 옛 동부 영토(현재 폴란드와 러시아 영토, 구 소련이 합병한 독일 영토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일부였으며, 각각 폴란드인과 러시아인이 정착해 있음)를 포함하도록 헌법적으로 확장될 가능성을 고려할 수 없다는 것을 명시하도록 개정되었다. 이러한 변화는 사실상 오데르-나이세 선을 독일의 영구적인 동부 국경으로 공식화했다. 기본법에 대한 이러한 개정은 2+4 조약 제1조 4항에 따라 의무화되었다.
8. 2. 국내적 영향
동독과 서독 간에는 생활 방식, 부, 정치적 신념 등에서 큰 차이가 남아 있어, 여전히 두 지역을 구분하는 것이 일반적이다. 이러한 현상은 "머릿속의 장벽"(독일어: Mauer im Kopf)으로 불리기도 한다.[94] '오시'(Ossis, 동독인)는 인종차별적이고 가난하며 러시아 문화의 영향을 크게 받는 것으로, '베시'(Wessis, 서독인)는 속물적이고 부정직하며 부유하고 이기적인 것으로 여겨지는 등 서로에 대한 고정관념이 존재한다.[95] 동독인들은 현상 유지에 대한 불만, 독일의 나머지 지역과의 문화적 소외감, 통일된 독일에서 그들의 문화 유산이 충분히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는 인식을 나타냈다. 반면 서독은 동독의 의견에 무관심해졌고, 이는 동독에 대한 반감을 더욱 증폭시켜 격차를 악화시켰다. 서독과 동독 모두 열린 마음으로 대화를 유지하는 데 실패했고, 제도적 경로 의존성의 영향을 파악하지 못한 것이 양측이 느끼는 좌절감을 증가시켰다.[96]통일 이후 동독 경제는 어려움을 겪었고, 서독에서 동독으로 대규모 보조금이 지급되었다. 경제적으로 동독은 서독의 5%에 비해 10%의 급격한 성장을 보였다. 서독은 여전히 GDP의 56%를 차지하고 있다. 동서 간의 이러한 불균형의 일부는 서독 노동조합의 "저임금 지역"을 방지하려는 고임금 협약 요구에서 비롯된다. 이로 인해 많은 동독인들이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었고, 동독 기업의 침체와 실업 증가에 더욱 기여했다.[97] 전 동독 지역은 종종 미국 남부의 재건 시대 이후의 남부 이탈리아와 비교되기도 한다. 동독 경제는 최근 회복되었지만, 동서 간의 차이는 여전히 존재한다.[98][99]
통일 후 전 동독의 경제 재건에는 많은 공공 자금이 필요했는데, 이로 인해 일부 지역은 호황 지역으로 변했지만 전반적인 실업률은 전 서독보다 여전히 높다.[106] 1990년부터 1995년까지 동독의 총 임금은 서독 수준의 35%에서 74%로 증가했고, 연금은 40%에서 79%로 증가했다.[110] 실업률도 서독의 두 배에 달했다.
8. 3. 베를린 통합
베를린 장벽 붕괴는 40년 가까이 서로 분리되었던 동베를린과 서베를린이 다시 하나가 되는 계기가 되었다.[112] 통일된 베를린은 주요 대도시로 성장할 것이라는 기대가 있었다.[113][114]베를린은 독일의 정부 소재지로 재건되면서, 수많은 외국 대사관을 위한 부지 재개발을 포함한 정부의 필요를 충족하는 건물이 필요했다.[52]
도시 정체성을 재정의하기 위해 베를린의 전통적인 경관을 복원하는 데 중점을 두었다. "비판적 재건" 정책은 나치와 사회주의 유산을 분리하려 했지만, 일부 유적은 보존되었고, 장벽의 기억을 보존하기 위해 국경 지대를 따라 산책로와 자전거 도로가 조성되었다.[52] 동베를린 중심부에서는 동독 국가의 모더니즘 유산 대부분이 점차 제거되었다.[54] 베를린 통일은 동베를린의 사회주의 유산을 줄이려는 시도로 동쪽의 정치적으로 동기가 부여된 거리 이름과 기념물을 제거했다.[114]
장벽 붕괴 직후 베를린은 건설업 호황을 맞았다.[51] 재개발 계획에 따라 베를린은 1990년대와 2000년대 초 세계에서 가장 큰 건설 현장 중 하나가 되었다.[53]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어려움이 있었다. 상업적 목적으로 부지를 개발했음에도 불구하고 베를린은 여전히 프랑크푸르트, 뮌헨, 함부르크 등 서독의 다른 주요 중심지와 경쟁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다.[116][117] 집중적인 건설 활동은 사무 공간의 과잉 확장으로 이어졌고, 높은 공실률을 보였다.[51][118]
베를린은 탈산업화와 관련된 경제 구조조정으로 어려움을 겪었다.[116][117] 경제학자 올리버 마크 하트위히(Oliver Marc Hartwich)는 동독이 경제적으로 개선되었지만, 당시 총리 헬무트 콜이 예측했던 것보다 훨씬 느린 속도였다고 주장한다.[119] 재통일 후 수십 년 동안 전 동독과 서독 간의 부와 소득 불평등은 계속되었다. 2014년 기준으로 전 서독 성인의 평균 자산은 94000EUR였던 반면, 전 공산주의 동독 성인의 자산은 40000EUR를 약간 넘었다.[120]
베를린 장벽 붕괴와 여러 요인으로 인해 대규모 이주가 발생하여 서독에 큰 노동 공급 충격을 주었다.[115] 1989년부터 1992년 사이에만 87만 명에 달하는 동독 이민[121]은 교육 수준이 낮은 노동자, 숙련 노동자 등의 고용 결과를 악화시켰다.[115]
세기말이 되자 베를린이 런던과 파리 사이의 유럽 세계 도시 중 한 곳을 되찾을 가능성이 낮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이는 독일의 금융 및 상업 중심지가 베를린이 아닌 다른 곳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었다.[114]
하지만 동베를린의 일부 지역은 거의 무료로 방치된 공간을 활용하면서 베를린의 창의적인 활동의 중심지로 부상했다.[122] 클라우스 보베라이트(Klaus Wowereit) 베를린 시장은 "베를린이 제공하는 최고의 것, 그 독특한 창의성. 창의성은 베를린의 미래다."라고 말했다.[122]
9. 평가
독일의 재통일은 긍정적인 평가와 부정적인 평가가 공존한다.
퓨 리서치 센터의 2019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독과 동독 주민 모두 89%가 통일이 독일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며, 동독에서 통일을 지지하는 비율이 약간 더 높았다.[128] 동독인의 약 83%는 시장경제 전환에 찬성했고, 13%는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의견을 유보했다.[129] 1991년 이후 동서독 모두 삶의 만족도가 크게 증가했는데, 1991년 동독인 중 15%가 삶의 만족도를 7~10점(0~10점 척도)으로 평가한 반면, 2019년에는 59%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서독인의 경우 52%에서 64%로 증가했다.[130]
그러나 독일 정부의 2019년 통일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동독인의 57%가 자신이 2등 시민이라고 느꼈고, 38%만이 통일을 성공으로 평가했으며, 40세 미만 인구에서는 이 수치가 20%로 감소했다.[131][132] 2023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동독인의 40%가 독일인이 아닌 '동독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했는데, 이는 52%였던 이전 수치보다 감소한 것이다.[133][134]
독일 통일은 서독과 관계가 있는 동독 가구들에게는 부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독에 거주하며 동독과 사회적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장벽 붕괴 후 6년 동안 평균 6%의 재산 증가를 경험했는데, 이는 같은 관계가 없는 가구의 두 배 이상이다.[135] 동독과 강한 사회적 유대관계가 있는 지역에서 일하는 기업가들은 소득이 증가했는데, 통일 후 6년 동안 이 그룹의 소득은 평균 8.8% 증가했다. 마찬가지로, 서독과 관계가 있는 동독 사람들은 통일 후 6년 동안 매년 가계 소득이 증가했다.[135] 그러나 같은 관계가 없는 지역 사람들은 이러한 혜택을 보지 못했다.[135]
동독의 경제 구조조정 및 재건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연대 부담금'(Solidaritätszuschlag|label=nonede) 형태로 재원이 조달되었다.[124] 베를린 자유 대학교의 발표에 의하면 통일에 들어간 비용은 1조 5,000억 유로로 추산된다.[150] 이는 1800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현재 구 동독 지역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매년 1조유로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150]
9. 1. 통일 비용
동독의 경제 구조조정 및 재건에는 막대한 비용이 소요되었으며, '연대 부담금'(Solidaritätszuschlag|label=nonede) 형태로 재원이 조달되었다.[124] 베를린 자유 대학교의 발표에 의하면 통일에 들어간 비용은 1조 5,000억 유로로 추산된다.[150] 이는 1800조원에 달하는 금액이다. 현재 구 동독 지역의 경제를 회복하기 위해 매년 1조유로 이상의 돈이 들어간다.[150] 연방 정부의 독일 통일 비용은 1조 5천억 유로에서 2조 유로로 추산된다.[125][126][127]주요 원인으로는 동독 경제가 서독에 비해 약했던 점, 동독 마르크와 서독 마르크 사이의 환율이 경제 현실을 반영하지 못해 동독 산업의 경쟁력을 떨어뜨렸던 점 등이 있다.[150] 서독 마르크와 동독 마르크의 1:1이라는 유리한 환율은 동독인들이 가치 없는 마르크를 서독 통화로 교환하고 서독 화폐로 임금을 받을 수 있게 하였으나, 이는 서독 예산에 큰 타격을 입혔다.[124]
9. 2. 견해 및 삶의 만족도
퓨 리서치 센터의 2019년 설문조사에 따르면, 서독과 동독 모두에 거주하는 독일인의 89%가 통일이 독일에게 이롭다고 생각하며, 서독보다 동독에서 통일을 지지하는 비율이 약간 더 높았다.[128] 동독인의 약 83%는 동독의 시장경제 전환에 찬성했고, 13%는 반대했으며, 나머지는 의견을 유보했다.[129] 1991년 이후 동서독 모두 삶의 만족도가 크게 증가했는데, 1991년 동독인 중 15%가 0~10점 척도에서 삶의 만족도를 7~10점으로 평가한 반면, 2019년에는 59%로 증가했다. 같은 기간 서독인의 경우 52%에서 64%로 증가했다.[130]그러나 독일 정부의 2019년 통일 연례 보고서에 따르면, 동독인의 57%가 자신이 2등 시민이라고 느꼈고, 38%만이 통일을 성공으로 평가했으며, 40세 미만 인구에서는 이 수치가 20%로 감소했다.[131][132] 2023년 여론조사에 따르면, 동독인의 40%가 독일인이 아닌 '동독인'으로 자신을 정체화했는데, 이는 52%였던 이전 수치보다 감소한 것이다.[133][134]
독일 통일은 서독과 관계가 있는 동독 가구들에게는 부를 창출하는 데 도움이 되었다. 서독에 거주하며 동독과 사회적 유대관계가 있는 사람들은 장벽 붕괴 후 6년 동안 평균 6%의 재산 증가를 경험했는데, 이는 같은 관계가 없는 가구의 두 배 이상이다.[135] 동독과 강한 사회적 유대관계가 있는 지역에서 일하는 기업가들은 소득이 증가했는데, 통일 후 6년 동안 이 그룹의 소득은 평균 8.8% 증가했다. 마찬가지로, 서독과 관계가 있는 동독 사람들은 통일 후 6년 동안 매년 가계 소득이 증가했다.[135] 그러나 같은 관계가 없는 지역 사람들은 이러한 혜택을 보지 못했다.[135]
10. 비교
냉전으로 인해 1949년부터 1990년까지 독일 외에도 여러 국가가 분단되었다. 한국(1945년~현재), 중국(1949년~현재), 예멘(1967년~1990년), 베트남(1954년~1976년)은 "서구 자유 자본주의"와 "동구 공산주의" 지역 또는 이전 점령 지역의 수립을 통해 분리되었거나 여전히 분리되어 있다.
한국 전쟁(1950년~1953년)과 베트남 전쟁(1955년~1975년)은 각각 한국과 베트남에 막대한 경제적 피해와 민간인 피해를 입혔다. 그러나 독일의 분단은 또 다른 전쟁으로 이어지지 않았다.
독일은 이들 국가 중 유일하게 이후의 폭력적 갈등 없이 평화적인 통일을 달성한 국가이다. 북베트남은 1976년 전쟁 후 공산 정부 통치 하에 베트남을 통일했고, 예멘은 1990년에 평화적인 통일을 달성했지만 내전으로 인해 통일 과정이 지연되었다. 북한과 대한민국, 중국 본토와 타이완은 여전히 높은 정치적 긴장과 엄청난 경제적, 사회적 격차에 직면하고 있어 통일이 어려운 과제이다.[137][138] 타이완 독립 운동은 중국의 통일을 더욱 어렵게 만들고 있다. 오늘날 동독과 서독은 여전히 경제와 사회 이념에서 차이가 있으며, 이는 남북 베트남과 유사하며, 독일 정부가 평등화하려고 노력하는 분단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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